신경숙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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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

디지쿤스트 2021. 5. 8. 17:37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나 하늘에다 대고 땅에다 대고 가슴을 뜯어 보이며 막말로 외치고 싶은데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을 수도 없는.... 그래도 살아내는 게 인간 아닌가  P323

 


 

 

'신경숙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읽고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연달아 읽어서 설정, 배경, 가족 구성 등이 겹치는 부분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지만, 전편보다 내용이 늘어져서 지루하다는 생각에 며칠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편해지시길 비는 마음이 커서였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행하여지지는 않았고, 식구들에게 당부의 말로 끝내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다 읽고 보니, 아버지의 삶을 다루는 소설이라면 재미를 추구한다기보다, 인생 뿌리를 흔들 만큼 기습의 순간에도 한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지루함을 단단하게 다져가는 삶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외국 소설 '101세 노인 시리즈'를 보면 괴팍한 노인,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 속에서 점점 따듯하게 동화되어가는 재미를 느끼며 읽곤 했었다. 그에 비해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우리 아버지들은 내내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독립운동의 위인, 전쟁의 영웅들 밑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억하지만, 가족들을 지켜온 아버지들의 이야기는 회자된 바가 없어 이런 작품이 나온 것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몰라 여쭈어봐도, 시대가 변했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어떤 삶을 견뎌왔던 걸까. 

 

가끔씩 풀어주시는 단어 몇 마디와 그때의 감탄사 정도만 흘려들어도 상당히 무섭고 공포스러운 세월을 겪으셨나 보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들이란 원래 식구들에게 까탈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고, 세상에 문을 열지 못해 늘 날을 세우시는 분들인가 싶기도 했었다. 그런데, 식구들과 자신을 지켜내느라 긴장해서 쉬지도 못할 정도로 힘들 만큼 정신력으로 버텨오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가 없어 약주 한잔에 잠을 청하는 할아버지들의 한숨을 들어온 손주들이라면 이 소설이 조금 더 와 닿을 것 같기도 하다.

 

신경숙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


사는 일이 꼭 앞으로 나아가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고 뒤가 더 좋았으믄 거기로 돌아가도 되는 일이제...
언진가 소새끼 한 마리가 젖을 빨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분질러지더니 주저앉아 걷는 법을 잊어버리고는 앉은뱅이가 되더라. 붙들고 있지 말어라. 어디에도 고이지않게 흘러가게 둬라..  P92 


 

 

줄거리 

 

이번엔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작가였던 딸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고로 딸을 잃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고, 가족들은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를 일부러 전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입원을 하게 되면서 고향에 홀로 남게 된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버지는 전염병이 돌아서 연이어 부모를 잃고, 형들도 잃고 혼자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면서 전염병을 피해 살아남았다. 전쟁과 4.19를 겪으며 서로를 구한 인연들이 있었고, 어려운 형편에도 아이들을 대학까지 키워내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꿈이었던 것 같다. 야학을 다니며 한글을 떼기도 하고, 한때는 집에 머물지 못해 한 번씩 밖으로 돌던 아버지였지만, 언제부턴가는 정착하면서 집을 돌봤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괴팍한 아버지의 느낌보다는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내내 깔려 있다. 그러던 아버지가 잠들지 못할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의 삶이 어땠을까. 작가는 아버지와 오빠와의 편지를 통해, 전쟁통에서 필사의 순간을 함께 지낸 박무릉 아저씨에게도, 조카에게, 엄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아버지의 첫사랑이었는지 모를 여인의 이름도 함께 찾아냈지만, 그 비밀은 밝혀지진 않았다. 다만, 아버지의 오랜 비밀이었던 아버지의 우울과 트라우마로 인한 감춰왔던 증세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아버지에게 갔었어' review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엄마의 뜻밖의 외출이나 솥뚜껑 깨면서 풀어낸 시간들이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버지는 끝내 궁금한 여인의 이름을 비밀로 남겼다. 내가 지니다 버거웠던 것들을 아버지가 대신 키워주시거나 맡아주셨다는 부분, 외로움의 대상이었는지 모를 풀지도 않은 택배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에게 삶이란 어떤 것일까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우리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어쩌지 못하고 마음이 허둥댈 때,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런 아버지에게 여리고 약하고 힘들었던 부분들이 발견되었을 때쯤에야 늦게 아버지의 삶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어떤 고통이 아버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것일까, 주인공은 작가라는 직업의 특성을 살려 아버지의 주변인들을 취재한다. 개인이 겪기엔 너무 커다란 상처들이 몸과 마음을 망쳐놓았지만, 견뎌내는 삶을 택한 아버지가 이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지만, 어색하다. 책 한 권 읽는 기분으로 덤덤하게 전하면 마음이 전해지려나.

 

 



너는 언제나 근사해따. 나는 아버지가 되어서 너의 힘이 돼주지는 모타고 니 어깨만 무겁게 햇지마는 너는 어지나 근사해따. 그러타 지금은 거기가 니 자리다. 너는 언지나 그래와떤 거처럼 니 자리에서 성실히 니 할 일을 해낼 거슬 나는 익히안다. 나는 더 바랄거시업다. p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