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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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를 읽고

디지쿤스트 2021. 5. 5. 22:15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신경숙 작가님의 소설을 꺼냈다. 마침 '아버지에게 갔었어'라는 신간이 나왔길래 '엄마를 부탁해'부터 서평을 남기기로 한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아버지에게 갔었어라는 소설을 읽는 중인데, 분위기가 비슷해서 읽기 수월하다. 이 책도 번역되어 다른 나라에서 출시가 된다고 하는데 한국 정서만의 독특한 문체라고 할까, 이런 표현과 감성들이 어떻게 번역이 될지, 이번에는 또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오빠 집에 모여 있던 너의 가족들은 궁리 끝에 전단지를 만들어 엄마를 잃어버린 장소 근처에 돌리기로 했다. 일단 전단지 초안을 짜보기로 했다. 옛날 방식이다.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그것도 엄마를 잃어버렸는데, 남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실종신고를 내는 것, 주변을 뒤지는 것, 아무나 붙잡고 이런 사람 보았느냐 묻는 것, 의류 쇼핑몰을 운영하는 남동생이 인터넷에 엄마를 잃어버리게 된 이유와 잃어버린 장소와 엄마의 사진을 올리고 비슷한 분을 보게 되면 연락해달라고 게시하는 것. 엄마가 갈만한 곳이라도 찾아다니고 싶었으나 이 도시에서 엄마 혼자 갈 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이니 문안 작성은 네가 해라, 오빠가 너를 지명했다. 글을 쓰는 사람. 너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귀밑이 붉어졌다. 과연 네가 구사하는 어느 문장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데 도움이 될지.

'엄마를 부탁해' 중에서 p10


 

이렇게 아무 설명 없이 '너의 가족들은'이라고 누군가 지켜보는 이가 말하고 있어서 읽기 시작하면서 이 어색한 느낌이 궁금해서 계속 읽게 만든다.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어떤 감동은 글로도 말로도 설명이 되지 않고, 감정처럼 정체되어 있다가 뭉쳐서 비로 쏟아져 내려오는 경우도 있다. 신경숙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둑어둑 어두워졌다가 끝끝내 몸살로 하루를 앓고 말았다. 읽으면서 이 소설이 번역되어서 다른 나라에도 읽히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그들은 이 엄마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할까.

 

소설에 나오는 '박소녀'라는 엄마는 나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엄마의 내용이었다. 현실적 조언과 도전보다는 안전을 추구하며, 최대한 비극적 요소를 제거하고 영리하게 생산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처럼 살아온 엄마를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함께 지내는 내내 갈등만 겪던 관계의 결과물인 '나'는 이 소설 속 작가의 이미지처럼 냉담하고 무뚝뚝하게 자라왔다. 그래서, 이런 신파적인 엄마의 이야기에 몰입되기가 정말 힘들다.  엄마라는 존재보다는 보살펴야 할 존재, 막말을 퍼부으면 꾹꾹 눌러 삼키다가 엉뚱한 행동으로 되갚아버리고 마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전부였던 것으로 추억된다. 그럼에도 소설로 인해 그 누구에게 묵혀두었던 미안한 감정, 정의 내리지 못하고 응어리져있던 뭉치들이 눈물이라는 도구로 치환되어 풀어졌다. 

 

따뜻한 아랫목의 밥 그릇이 지금 현실엔 존재하지 않듯이 포용과 희생의 부재로 인해 어딘가 모르게 삐뚤어지고 차갑게 살고 있는 현실의 자신을 쉽게 동정해버리곤 했다. 내가 이렇게 팍팍하게 사는 건 '그런 엄마'에게 사랑받고 살지 못해서 일까 하고, 인생을 달래 왔던 것이다. 잃어버린 파랑새처럼 환상을 쫓다가 어쩌면 바로 옆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내 안에 아직 잠재되어 있는 모성을 자극하는 소설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심금을 울리기에 절절한 표현들을 아낌없이 피력했다는 생각이다. 마지막 엄마의 독백은 작정하고 크리넥스를 꺼내 묵혔던 감정을 풀어내기에도 충분했다. 읽기 시작하고 끝까지 단숨에 막힘없이 읽어갈 정도로 몰입하기에도 좋았다. 이 소설의 '나'는 계속해서 엄마의 시선으로 풀고 있으며, 엄마가 관찰자로 딸과 아들, 남편을 '너'와 '당신'으로, 마지막에는 엄마 자신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독특한 소설의 장치가 사는 동안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식구들을 위해 살아온 인생을 풀어나가며 몰입하게 만든다. 처음 들어보는 엄마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작품 속에서 엄마를 제대로 기억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였다.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사느라, 저절로 밥이 채워지고, 저절로 청소가 되고 세월의 힘으로 자신들이 성장하며 살아왔노라 여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엄마의 부재로 일상의 균형이 균열되고 나서야, 식구들은 엄마의 부재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슬픔을 서로의 탓으로 떠넘기기도 하면서 다시 또 자신들이 남은 삶을 채워간다. 

 


 

"엄마, 나는 엄마가 행복했었으면 좋겠어. 엄마의 삶. 아니,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 그렇게 젊고 푸릇한 여성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엄마... 엄마를 부탁해..."

'엄마를 부탁해' 중에서 p10

 

 


 

일제시대와 전쟁을 치른 세대, 많은 희생을 치르며 지켜온 나라였기에 그들의 삶 역시 식구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임을 당연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어서,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살아있음을 감사히 여기고, 자신들의 삶과 다르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아이들을 보며 행복의 지표로 삼았을 엄마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받아들일까. 지금의 삶은 그때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살게 되었지만, 감히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름없이 살아온 엄마들, 할머니들의 삶이 있었기에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이런 소설로나마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눈물로 풀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