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습관 도리스 레싱 단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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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습관 도리스 레싱 단편선

디지쿤스트 2020. 3. 3. 23:07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지난 후의 유럽의 여러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 군상을 담은 사회고발성 작품이 아니라 다양한 일상 속에서 맞닥뜨리는 전쟁의 파편들이 작가의 독특한 문체로 묻어 나옵니다. 전쟁의 불편한 단면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담담한 문체로 뱉어낸 일상 속의 전쟁의 파편은 꽤나 시니컬하게 느껴집니다. 

 

총을 맞대고 싸우던 나라의 출신인 두 사람이 휴가를 보내면서 각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된 신문을 세우고 장벽 삼아 피하는 장면이 재미있게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독일의 휴양지에 다수의 미군들이 자랑스럽게 활보하는 장면이 누군가의 시선으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작품을 통해 열어 봅니다. 

 

 

 

 

 

 

 

사랑하는 습관 도리스 레싱

 

전쟁, 승리, 패배 그 어떤 사실과도 "환상을 품지 않고 단단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사람들은 전쟁이 가져다 준 사실을 희극화해서 조롱하거나 왜곡하기도 합니다. 작가의 의도적 구성인 것 같습니다. 승리한 나라도 패배한 나라도 없이 전쟁의 기억을 공유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담아내는 듯 합니다.

"그 어떤 환상에도 단단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작품을 통해 얻은 이 문장이 21세기의 현실에도 여기저기 통용되기 시작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어떤 모습으로든 전쟁의 상흔은 남아서 인생의 변곡점을 만들고, 때론 통째로 뒤흔듭니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와 패자에 의해 각각 승자의 편집된 기록 또는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 차 마음 아프게 읽히곤 합니다. 반면 이 소설은 누구의 편에서 한곳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게 써내려갑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조한 문체이기도 하죠. 

 

"사랑이 습관이 되었다는 표현이 조지의 마음속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생각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자신의 맨살에 누군가의 맨살이 닿는 느낌, 젖가슴이 닿는 느낌에 본능적인 반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비가 지금껏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사실상 그녀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p.38)

 

 

대표작 "사랑하는 습관"은 사랑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온 카사노바의 때늦은 성장통(?)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 연인을 통해 느껴가는 사랑의 습관, 그제서야 '사랑은 갈증처럼 일시적으로 피어나는 감정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아갑니다. 그동안 자신이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져 부인과 연인들에게 어떤 잘못을 했고, 어떤 죄책감을 느껴야 했는지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지금의 이 혼란을 전쟁 같은 시기를 겪어가는 중이라고 한다면, 전쟁을 실제로 겪은 이들에게 조롱으로 여길 사람들이 있겠지만, 일상으로부터의 격리를 겪는 어려움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각각의 언어로 된 신문을 높게 들어 각 나라 자국민 보호를 위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 높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공포가 경제를 뒤흔들고 국민들의 동참과 협조가 필요한 중에도 각자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찾고, 냉장고를 채워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도 무시되면서 자주 무기력해지곤 합니다. 

이런 무기력에 대해 서술한 재미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타성에 젖은 관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해 무기력함을 느끼는 [연인]이라는 작품은 묘한 감정선을 타고 엉뚱한 분노로 끝이 납니다. 과거의 잘못을 운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좋은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듯, 작가는 모험과 변화를 갈구하라고 종용하는 듯 보입니다. 비슷하게도 우리나라 역시 전쟁 후 계속해서 역동적인 시대를 겪어왔습니다. 모험과 변화를 강조하던 시대를 지나 오늘날의 젊은 시대는 실제로는 기존 세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으며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일상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종종 무기력함을 느끼곤 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나라, 정치적 관계, 성별, 종교, 나이 등 여러 가지 층으로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적 정서적 반응도 개인의 감정적 반응도 역시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태 역시 언젠가는 어느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수면위로 떠오르겠죠.

마찬가지로 작가는 작품을 통해 변화와 모험을 강조하며 스스로도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모험과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선 문제의식과 이상에 환상을 품기보다 담담한 눈으로 문제를 다룰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는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시국에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통치적 관점이 외부적으론 어떨지 몰라도 자국민에겐 무척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과연 레싱이라면, 지금 이런 시국에 어떤 작품으로 그 만의 환상을 내놓았을까요.